작성일 : 13-08-15 20:39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김 광 화
 글쓴이 : dentalnews (123.♡.11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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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김 광 화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꽤나 개구쟁이였다.  차라리 한 때 문제아였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 까지는,
나를 담임했던 선생님들마다 천방지축 산만한 나의 행동 때문에 무척 속을 태웠다.  1학년때의 담임선생님은 젊은 여선생님이었는데 오죽했으면 눈물까지 보이셨을까 ?  운동장에서 애국조회를 하는 중에 교모를 거꾸로 쓰고(그 당시에는 초등학생도 모자를 쓰고 다녔다) 돌아서서 뒤 친구와 장난을 치는 게  교장선생님의 눈에까지 들어왔고 훈시를 하시다 말고 마이크에 대고 나를 지적했으니 선생님의 입장이 어떠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추억은 아름답다는 말처럼 지금에 와서 회상하면 철부지 했던 그때의 내가 귀엽게만 느껴지지만 당시 선생님들에겐 골칫거리 존재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문제아동의 행동은 4학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곱게 따 내린 앞줄의 여학생 머리에 성냥개비 쑤셔 넣기,  발표를 마치고 좌석에 앉으려는 짝의 의자를 뒤로 빼내어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찧게 하던 일, 그림에 솜씨가 있는 편이어서 자연과나 실과, 미술시간이면 급우들로부터 곧 잘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동물이나 사람 그림 같은 경우엔 맨 나중에 그것(?)까지도 그려서 애를 먹이던 장난도 서슴치 않았다.  나의 장난 끼에 견디다 못한 친구 들은  종종  지원군을 요청했고 형이나 오빠 혹은 엄마에게  꿀밤을 맞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좀처럼 수그러질 줄 몰랐다.  나의 그런 장난 끼는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필을 잔뜩 먹은 칠판지우개를 선생님 출입하는 문틈위에 끼워 놓고 문 열다가 놀라 당황해 하는 선생님을 보며 킥킥대던 일, 
 “선생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든지 물어보렴.”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데 맞습니까?”
 “ ...... ”
붉그락 푸르락 어쩔 줄 몰라 하시던 그 대머리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매사 이러고 보니 칠판 한 쪽 켠의 <떠든사람>명단에 나의 이름 석자는 늘 단골로 자리 잡았다.
 4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 둔 어느 날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방학 마무리 업무 때문에 교실을  비울 때가 잦았다.  이 때를 놓칠 새라  책상을 징검다리 삼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중 그만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다.  선생님은 상기된 얼굴로 우리들을 불러내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손에는 부서져서 몸뚱이만 남은 비닐우산의 막대가 들려져 있었다.  ‘아이고 이제 난 죽었구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꼴이 되어 도착한 곳은 체육 창고로 쓰이는 외진 곳이었다.  바지를 걷어 올렸다.  내 바지가 아니고 선생님 자신의 바지를허연 종아리가 다 드러나도록 걷어 올리셨다. 
 “너희들이 이렇게 행동이 바르지 못한 게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다. 내가 매를 맞아야 마땅하지.”
울먹이며 용서를 비는 우리들의 애원엔 아랑곳 하지 않고 수차례 종아리를 내리 치셨다.    금 새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날  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개구쟁이의 끼를 주체하지 못한 탓에 눈물이 찔끔 나도록 심한 체벌도 많이 받았었지만 그날의 눈물과는 달랐다. 순간의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생리 현상일 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눈물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나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낄 만큼 달라졌다.  어린 나이에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말이 극히 당연하게 받아드려졌던 때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의 신문에서 체벌에 분개한 중3학생이 선생님을
주먹으로 쓰러뜨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교사의 처신이 못마땅하다고 제자들이 있는 교실에서 담임의 뺨을 때리는 무례한 학부모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생님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시는 모습을 보며 울부짖을 수 있는 제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  아무튼 나는 그 선생님 덕택에 자칫 문제아로 계속 성장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 순간에 소위 모범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내마저도 나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지금은 이미 교직에서 은퇴 하신지도 오래 되셨을 텐데 아직 살아계실까?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동안 단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럽다.  설령 찾아 뵈온 들 기억이나 해 주실 런지도 모르지만 왠지 살아 계셔서 그 어디에선가 이 글을 읽으실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드는 건 그 만큼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있지 않으면 스승의 날이다  이번 스승의 날엔 개구쟁이적 어린 시절의 모교를 방문하여 나와 선생님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아직 그대로 있을지도 모를 체육창고 앞에서 나의 종아리를 걷어 보련다.  선생님의 심정이 되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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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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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조선문학 문우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