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08 23:51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추억
 글쓴이 : dentalnews (123.♡.11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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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추억 

       
                          양정승 (광주보건대학 치위생과 교수·방송국장·치의학박사)

일상이 번거로워질 때면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잠시 낭만에 젖곤 한다. 모든 것이 구속처럼 느껴지던 어느 해 여름, 삶의 버거움 속에서 잃어버린 존재를 찾고 싶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하여 길을 나서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그러할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었다. 
험한 풍토 속에서 끊임없이 온화한 지중해를 동경해 온, 자신을 에워싼 것에 대해 친화감을 갖지 못하였기에 끝없이 무한한 것에 대한 강렬한 희구를 가졌던 독일을 보고 싶었다. 거기에서라면 어쩌면 내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용기를 내어 길을 나섰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알프스 산맥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는 흰구름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는 동안 네카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짙은 녹색을 배경으로 고풍스럽게 자리한 성을 둘러보며 많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13세기 초에 축성된 하이델베르크성은 숱한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지만, 그 돌 벽에 아로새겨진 상혼들은 그토록 찾고자 하는 나의 무게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애써 삶의 무게가 갖는 주관적 크기의 동일함을 되내이며 자위하였다. 선 채로 돌이 되어버릴까봐, 돌 벽에 꽂혀버린 나의 시선을 힘겹게 거둬들였다.
광장 곁에 있는 맥주집 <붉은 황소>가 있는 곳을 내려다 보면서는 한 때 젊음을 다해 사랑을 불태웠던 '황태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더욱더 절절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심정이 되어보았다. 카를 하인리히 황태자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이 눈앞에 잡힐 듯 그려지는 것 같았다.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줬던 황태자의 첫사랑, 그런 사랑을 몽상이라고 비웃는 세상을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다.
아테네 여신상이 놓여있는 카를 테오도어 다리 건너 '철학자의 길'을 바라다 보면서는 사색에 잠긴 채 그 길을 걸으며 작품을 구상했을 괴테와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되어보기도 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던 괴테는 왜 그리도 슬픈 사랑만을 노래했을까. 사랑의 빛깔을 괴테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인가.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과 절망, 고뇌와 죽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이 빠져들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항상 자신에게 엄격해야 했던 현실이 숨막힐 것 같아 잠시 일탈을 꿈꾸며 달려 왔던 이곳에서조차 또 다시 틀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 반란을 꿈꾸어 보기로 했다. 독일이 자동차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두 집에 한 대 꼴로 자전거를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즐긴다는 소리를 듣고 그 즐거움에 동참해 보기로 했다. 머나먼 타국 땅, 이 곳 하이델베르크에까지 와서 고작 추구하는 일탈이 자전거 타기라는 생각에 이제껏 걸어 온 시간에 회한이 어우러졌다.
맑은 물이 흐르는 네카강변을 따라 펼쳐져 있는 잔디밭 옆으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 페달을 밟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성 위에서 가슴을 짓누르던 온갖 무거운 상념들이 깨끗이 걷혀지고 오직 싱그러운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그 자체에 빠져있는 자신만이 존재했다. 나를 찾는 작업은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순간만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네카강이 일러주는 것 같았다.
가끔 삶이 버거워질 때는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자신과 또한 거기에 익숙해져왔던 자신의 견고한 껍질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가벼움을 느꼈던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자전거 타기를 생각해 본다.